크리델라 오테로 이야기 1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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*크리델라 오테로 일지1
{np} 작고 초라한 집에서 투박한 침상 위에서 한 남자가 마지막으로 손을 뻗었다.
크리델라는 그 남자 즉, 그녀의 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았다.
{np} [미안하다. 크리델라. 명색이 귀족으로 태어나 이런 처지에서 죽는 것은 내가 무능한 탓이지만, 네게 해 준 것이 없어서 정말 미안하다.]
{np} 크리델라 오테로는 죽어가는 아비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.
[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기운을 차리세요.]
[할아버지 시절의 재산만 있었어도 네 미래를 다르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..]
[제 미래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.]
[미안하다.]
{np} 다시 그 말을 반복한 크리델라의 아버지는 더 이상 기운이 없는 듯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.
그런 아버지를 보며 두 끼를 굶은 크리델라 역시 피곤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.
그리고 그녀가 잠에서 깼을 때 아버지는 잠자듯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.
{np} 아버지의 초라한 장례를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마치고, 아직 십대의 어린 소녀인 크리델라는 이제 혼자 남은 빈집에서 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못하고, 마침내 그 눈물마저 말랐을 때,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.
{np} 크리델라가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, 문을 두드리던 사람은 문이 열려있고, 안에 사람의 기척이 있었기에 결국 문을 밀고 들어왔다.
들어온 사람은 둘이었는데 하나는 마을의 촌장이었고, 다른 한 사람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.
{np} 그 남자는 크리델라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.
[아버지가 얼마 전에 이런 상황에서 나 같은 사람을 만나고, 또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는 일이 힘들겠지만..]
{np} 크리델라는 그 말을 다 듣기 전에 눈가를 닦고 굳건한 얼굴을 일부로 과시하며 말했다.
[오테로 가문은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해서 할 일을 미루지도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습니다.]
남자는 그 말을 듣고 얼굴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.
{np} [아직 어린 여자 아이치고는 대단하구나. 너희 가문을 두고 하는 말 가운데 초대 마넬Manel 오테로의 자질을 반이라도 이은 자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.]
남자는 이런 말을 하며 크리델라 오테로의 표정을 살폈으나 가문에 모욕적인 말을 들었어도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.
{np}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제력이 있어서였다.
남자도 그런 점을 충분히 인식했는지 내심 다시 한번 그녀를 인정했다.
남자는 그런 인식을 지니고 자신이 할 말을 시작하였다.
{np} [38대 국왕이셨던 테르마넬 국왕께서 이름과 작위를 하사하여 마넬 오테로가 너희 가문의 시조가 된 이후 너까지 5대에 이르는 동안 영지는 이미 3대 전에 팔아 넘겼고, 가문의 재산과 수집품은 모두 팔리거나 저당을 잡혔다.
{np} 특히 워델 국왕 시대의 대화가 새커레Sakkurrhe의 그림을 놓고 공연한 자존심을 벌인 탓에 날린 재산은 아쉽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. 그 명화들 역시 지금은 헐값에 남의 손에 죄다 넘어갔고, 그나마 네 아버지에게 있던 명목만 남은 귀족의 작위 역시 이제 너와는 상관없다.]
{np} [저도 알고 있는 사실은 굳이 다시 말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. 그보다 그런 말을 하시는 분은 누구신가요?]
[아! 이런 내 소개를 안 했구나. 이런 실수를 봤나. 나는 케도라 상단에서 나온 크디트Kdit라고 한다. 상황이 안 좋으니 만나서 반갑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,
{np} 일단 만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. 그런데 아직 나이도 어린데 내가 말한 사실을 알고 있다니 대단하구나. 아무튼 그래도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.]
{np} 크리델라 오테로는 별다른 대답 없이 크디트의 말을 기다렸다.
[일단 네 아버지는 귀족으로 태어나고 돌아가셨지만, 아는지 몰라도, 우리 왕국의 귀족지위 세습은 영구적이지 않다. 오테로 가문은 시조의 사후 대대로 왕국에 어떤 공헌도 못했고, 가문의 명성과 재산을 날려왔다.
{np} 그래서 이제 네 대에 이르러서는 귀족이 아니다. 따라서 네게는 귀족이 누리는 여러 혜택과 특히 세금 문제에 대한 특혜가 없다. 그런데 사실 이게 문제가 안 되는 것이 너희 집안에는 재산이 없다. 이 집과 여기 속한 그릇 하나도 이제는 우리 케도라 상단의 것이다.
{np} 그래도 다행히 네 아버지는 다른 곳이 아닌 케도라 상단에서 대출을 할 정도의 분별은 지니고 있었다. 그리고 우리 케도라 상단은 손해를 몇 푼 더 줄여보겠다고 고아 소녀의 모든 재산을 탈탈 터는 사람도 아니다. 그렇지만 네가 여기서 계속 살게 둘 수는 없다.
{np} 돈 때문이 아니라도 그건 어차피 안 될 일이다. 따라서 너는 성인이 될 때까지 너를 돌봐줄 후견인에게 보내질 것이다.]
[후견인이요?]{
{np} [아니면 성직자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보내야 하는데 그보다는 후견인이 낫다고 생각한다. 대개는 자기가 속한 지역의 영주님에게 보내지고 거기서 잡일도 하고 교육도 받는다. 성인이 되면 스스로 살 수 있도록 대개는 기술을 배우거나 하지만, 재능이 있다면 뭐든지 배울 수 있다.
{np} 왕국법상 지방 영주는 아무리 비싼 교육이라도 그 비용을 다 지급할 의무가 있다. 물론 기본적인 교육에 포함될 수준이 아닌 비싼 학습은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네가 성인이 되면 천천히라도 다 갚아야 한다.]
{np} [그럼 저는 여기 영주님의 성으로 가게 되나요?]
[그게 조금 다른데.. 원래는 그게 맞지만, 네 경우는 다르다. 다른 후원자가 나섰다.]
[어떤 분이신가요?]
[그것은 여기서는 밝힐 수 없다.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. 후견인 자리는 하고 싶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, 우리 케도라 상단도 돈만 따지면서 남의 일이라고 신경 쓰지 않는 그런 단체도 아니다.]
{np} 크디트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.
[생업에 바쁜 동네 사람들을 대신해 우리 상단이 너를 후견인에게 데려다 주겠다.
{np} 이런 말 우습지만, 비록 우리 상단 화물 수송을 맡은 사람들과 같이 겸사겸사 보내는 것이긴 해도 돈만 따지면 이건 손해다.
{np} 낡은 집과 가재 도구로는 어차피 네 아버지의 대출금에도 못 미치니 사실은 시작부터 손해기도 하고, 그렇지만 집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가도 좋다.
{np} 아, 물론 집밖에 뭐 숨겨놓은 것이 있어도 마찬가지고, 단 네가 들거나 지고 갈 수 있는 무게만큼만이다. 가방을 하나 택해서 거기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소중한 추억이 담긴 것을 챙겨라.
{np} 설령 그 안에 숨겨둔 금괴 덩어리를 넣는다고 해도 나나 상단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가능한 많이 챙기길 권한다. 물론 그것을 제외하고 여기 남겨진 모든 것은 우리 상단이 접수해서 활용하든지 매각하든지 할 것이다. 몇 시간 시간을 줄 테니 우리가 다시 올 때는 떠날 준비를 마쳤으면 한다.]
{np} 그런 말을 듣고 크리델라가 알겠다는 인사를 하자 크디트가 나갔고, 남은 촌장은 마을 주민이 죽고 어린 딸만 남았을 때 할만한 위로와 인사를 건네고는 그 역시 집을 나섰다.
촌장이 밖으로 나가니 케도라 상단원 크디트는 멀리 가지 않고, 주변에 있었다.
{np} 크리델라에게 자리를 비워주기로 했으므로 두 사람은 더 멀리 가지 위해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.
어느 정도 걸었을 때 촌장이 말했다.
[케도라 상단이 이 정도로 자비로운 단체인지는 몰랐습니다.]
{np} 크디트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.
[저희 상단은 절대 손해를 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. 어딘가에서 크게 베풀면 어딘가에서는 크게얻어서 전체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. 좋게 생각하면 어딘가에서 크게 베풀기 위해서 어딘가에서 효율적으로 돈을 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.]
{np} 촌장은 크디트가 한 말의 나쁜 측면을 쉽게 말할 수 있었지만, 굳이 그것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.
대신 이렇게 말했다.
{np} [그나저나 후원자가 나섰다니 크리델로에게는 다행입니다. 저희 마을 처지에서도 그렇고요. 저희 마을이 돌보지 못하면 영주님에게 보내야 하는데 그러면 평생 이런저런 잡일이나 하다가 남의 땅이나 가는 처지로 평생을 살 텐데..]
{np} [그런 인생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요?]
[그래도 한 때는 귀족이었던 집안의 여식인데 다른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.]
크디트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.
{np} 다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.
‘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후견인에게 증명하지 못하면 이런 촌구석 소작농의 아내가 되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겠지. 그러나 지금 크리델라에게는 스스로 그 어떤 인생도 선택할 기회도 없지. 다만 내비친 심지와 태도를 보면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지만...’